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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 늙은가는 아내에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은정
작성일 12-03-23 20:20 | 조회 1,464 | 댓글 9

본문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을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 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황지우 -

댓글목록

오춘희님의 댓글

오춘희 작성일

나도 먼먼훗날 나의 무게조차 버겁게 느껴질 날이 올때 내 옆에 늘 있어준 그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미운 것만 자꾸만 생각나서요.

이복희님의 댓글

이복희 작성일

울신랑에게 맛난반찬해주고 많이 챙겨주고"마누라밖에 없지" 했더니만 신랑이 "그래 나도 잘해주께"한다.

이말을 듣고있던 우리딸이 한마디하네요."그래 둘이 서로위해주세요" 난 그냥있을께합니다..ㅎㅎ

한미자님의 댓글

한미자 작성일

오늘 매일신문에 황지우의 시를 봤는데 여기서 또보네요. 황지우시인만의 독특함이 느껴지네요.감상 잘하고 갑니다^^

노정희님의 댓글

노정희 작성일

부부의 모습이 이런 것이겠죠?
특별히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는...
그냥 살아가는 것.
젊은이들의 자극적인 이벤트가 좋아 보이긴 하지만

이은정님의 댓글

이은정 댓글의 댓글 작성일

그래도 간혹 이벤트도 잊지말아야죠.
그게 순간순간 살아가는 재미도 된답니다.
오늘은 남편의 지친 등을 뒤에서 살며시 안아줘보세요.
그런게 이벤트죠.ㅎㅎㅎ

권문주님의 댓글

권문주 댓글의 댓글 작성일

회장님 으~~ 닭살 !!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ㅎㅎ

조은숙님의 댓글

조은숙 댓글의 댓글 작성일

저랑 같은과네요. 문주샘 ㅎㅎ

신명희님의 댓글

신명희 작성일

부부가 서로 위로해 주며 함께 늙어 간다는것
같이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게 아닐까요?

이복희님의 댓글

이복희 작성일

퇴원하고 울신랑 장봐서 요리하고 설겆이꺼정 잘해줍니다.
요즘같아서는 뒤에서 한번 안아주고싶어요...대패들고오실까봐  도망갑니다. 잽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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